구조조정에서 정치가 해야 할 역할

김상조 | 경제개혁연대 소장, 한성대 교수   작성일시: 작성일2016-05-04   

안타까운 일이지만, 내가 지난번 칼럼에서 우려했던 상황이 점차 현실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총선이라는 민감한 시기에 여당이 ‘한국형 양적완화’라는 복잡한 이슈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야당은 즉각 ‘중앙은행 독립성 침해 및 관치금융 심화’라는 교과서에 있는 안전한 정답으로 반박했다. 정치적 대립 전선이 분명히 그어졌다. 그런데 여소야대의 총선 결과가 드러나자마자 이번엔 야당이 ‘조건부로 구조조정에 협조하겠다’며 선공에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통령이 국책은행의 자본확충을 위한 ‘선별적 양적완화’를 공식화했고, 야당은 ‘국정에 실패한 대통령의 사과 및 감독당국·산업은행의 책임 추궁’을 선결조건으로 하는 원칙론으로 되돌아갔다.


이쯤 되면 구조조정 이슈가 산으로 가고 있다고 봐야 한다. 문제도 알고 있고 답도 대충은 아는데,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꼬이기만 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문제의 근원은 정치다. 그러면 ‘구조조정 이슈에서 정치는 빠져라’라고 하는 것이 정답인가? 천만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관료와 산업은행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 의사결정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럼 정치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한국경제의 현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고 그에 대한 정치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처리해야 할 부실기업이 대우조선해양·현대상선·한진해운 정도이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산업이 조선업·해운업 정도에 그친다면,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원칙(법정관리)이든 편법(관치금융)이든, 한국경제가 그 정도 비용도 부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끝날 상황이 아니니까 이 난리 아니겠는가. 중소·중견기업만이 아니라 재벌그룹 상당수도 부실징후 상태에 있는데, 중국의 위협이 현실화하고 저성장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한국기업이 부실을 털어내고 반등할 계기를 잡기 어려울 거라고 판단한다면, 그래서 시스템 위기가 우려된다면, 비상계획을 짜고 컨트롤타워를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정치적 의사결정을 정치가 해주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다음으로, 뭔가 비상수단이 필요하다면, 결국 돈 문제가 대두된다. 대규모 구조조정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할 방법은 세 가지뿐이다. 재정(추경과 증세), 공적자금(정부보증채권 발행), 양적완화(중앙은행의 발권력 동원) 등이 그것이다. 이 모두가 고도의 정치적 행위다. 증세는 박근혜 정부의 정체성이 걸린 문제다. 공적자금은 곧 경제위기를 연상시키는 트라우마가 있다. 양적완화는, 일반적이든 선별적이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충격을 야기할 수 있다. 이럴진대 어떤 수단을 어떤 조건에서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기본 방향을 정치가 정해주지 않으면, 그걸 관료보고 정하라고 한다면, 누구도 결정의 책임을 지지 않은 채 마냥 시간을 죽이면서 위기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지금 딱 그런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대규모 구조조정이 진행된다면, 1997년 외환위기 때 경험했듯이, 다수 국민에게 엄청난 고통이 뒤따를 것이며 그 후유증이 장기간 지속될 것이다. 그걸 나 몰라라 한다면, 더 이상 정치가 아니다. 그렇다고 개별 기업의 구조조정 과정에 정치가 개입하면 그야말로 개판이 된다. 특히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의 부실기업이라면 이미 고용유지 능력을 상실했는데, 여기에 미주알고주알 개입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구조조정 추진과 사회안전망 구축이라는 지난한 과제들을 결합하는 동시에 그 사각지대를 적극적 거시정책으로 보완함으로써 불특정 다수 국민의, 특히 경제적·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경감하는 유연한 전략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정답이 없다. 정치가 큰 틀을 결정하되, 세부적인 내용은 (미우나 고우나) 관료에게 맡기고, 그 결과에 대해 정치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걸 정치가 해야 한다.


그래서 조속히 여·야·정 협의체를 구성, 가동할 것을 제안한다. 특히 야당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뒷짐 지고 안전한 정답만 말할 때가 아니다. 한국경제가 망하고 난 다음에 정권을 잡은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이야말로 야당의 수권능력을 보여줄 때다. ‘결정하고 책임지는 모습’, 그것이 정치의 역할이며, 국민이 야당에 요구하는 바가 바로 그거다.


정치가 제대로 돌아갈 것을, 야당이 잘할 것을 기대해서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이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조조정에서 정치는 빠지고 시장에 맡겨라’는 말이 가장 정치적인, 가장 왜곡된 정치적 입장이다. 정치적 의사결정은 정치가 맡아야 한다. 그리고 정치가 책임을 져야 한다.


* 이 글은 경향신문 5월 4일자에 실린 글로 필자의 양해를 얻어 게재합니다.